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 규쥬(久寿) 2년(1155년) [[코노에 덴노]]가 붕어했을 때, 마사히토 친왕의 제1황자이자, 제2황후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였던 모리히토 친왕이 즉위할 때까지의 중계(中継)로서 마사히토가 황태자 책봉도 거치지 않고 2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모리히토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엄연히 친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장유유서의 서열을 넘어서 즉위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조정 중신들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본래 새로운 천황의 즉위 → 즉위식 → 태자 책봉의 순서로 이루어져야 했지만, 새로운 천황의 즉위식도 치르기 전인 9월에 도바 법황의 주도로 모리히토 친왕의 황태자 책봉이 이루어진 것도 고시라카와 천황 즉위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호겐(保元) 원년(1156년) 도바 법황이 붕어하고 '''[[호겐의 난]]'''이 발발했다. 역사를 바꿀 이 내란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천황의 후견인이었던 신제이(信西)였고, 고시라카와 덴노는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스토쿠 상황군의 패배로 내란이 끝난 뒤 신제이는 정권 강화에 힘써 '''《호겐신제》'''(保元新制)라 불리는 신법을 발표했다. 그는 소엔(荘園, 장원)의 정리와 거대 지샤(寺社, 절과 신사) 세력에 대한 규제, 황궁인 다이리(內裏, 내리) 재건에 착수했다. 호겐 3년(1158년) 고시라카와 덴노는 [[니죠 덴노|모리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 이것은 당초 예정된 일이었으며 >'''부처와 부처 사이의 평정(評定)''' {《효한키》(兵範記) 호겐 3년 8월 4일조} , 즉 출가한 비후쿠몬인(후지와라노 도쿠시)과 신제이 두 사람의 협의에 따른 것이었다. 부황 도바 상황의 영지 대부분은 비후쿠몬인과 쇼시 내친왕(暲子內親王, 하치조인)에게 넘겨졌으므로 고시라카와 상황은 [[호겐의 난]]에서 패배하고 죽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로부터 몰수된 영지를 자신의 영지로 흡수하는 등 경제적 기반을 형성해나갔다. 니죠 덴노의 즉위로 조정에서는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는 '''인세이파'''(院政派, 원정파)와 니죠 덴노를 지지하는 '''친정파'''(親政派)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인세이파 내부에서도 신제이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 사이에 반목이 생겨나는 등 '''조정은 3개의 당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3파간의 대립은 헤이지(平治) 원년(1159년)에 일어난 '''헤이지의 난'''으로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12월 9일 밤에 인노고쇼(院御所, 원어소)가 있었던 산조도노(三條殿)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군대에 야습을 당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은 니죠 천황과 함께 다이리에 유폐되었고, 신제이를 제거한 노부요리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친정파와 손잡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가 무력으로 노부요리 등을 격파하고, 인세이파를 무너뜨렸다.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은 전란 도중에 자력으로 고쇼를 빠져나와 닌나지(仁和寺)로 피신했고[* 이때 쟁탈의 대상이 된 것은 니죠 천황이었고, 신제이가 살해된 뒤 정치력을 잃은 고시라카와인은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난이 평정된 뒤, 친정파의 중심에 서있었던 오이노미카도 쓰네무네(大炊御門経宗), 하무로 고레카타(葉室惟方)의 체포를 승자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명령했다.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함께 신제이 살해의 주모자로 몰려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이후 양파의 대립은 고착 상태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